광산 개발

아키타번내에는 사타케 일가가 오기전부터도 몇 개의 광산은 있었습니다만 그렇게 번성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사타케 가문이 아키타에 온 이후, 히타치 지역에“히타치의 금은광이 지하 루트를 통해 전부 아키타로 갔다”는 소문이 퍼졌을 정도로 아키타의 광업은 크게 번성하였습니다. 초대 번주 요시노부 시대인1606년에 인나이 은광이 발견되어, 2대의 요시타카 때는 금광 채굴 목적이었던 아니광산을 구리광산으로 개발하는등, 이 두 곳의 양대광산은 번내 재정의 버팀목이 되었습니다. 인나이 광산과 아니 구리 광산은 번정말기에는 그 산출량도 많이 줄었지만 채굴은 이어졌으며, 메이지 정부로까지 이어졌습니다.

아니 광산도   아키타 대학 광업 박물관 소장

번정 이전에는 금광으로 개발된 아니 광산이었습니만, 1670년 오사카에서 제련업을 하던 기타쿠니야 기치에몬이 구리 광산으로 개발하여, 후에 번에서 관리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아니 구리 광산은 이요지방의 벳시광산과 함께 일본 굴지의 광산으로 18세기에는 막부 공식 구리 생산량의 38%를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인나이 은광 갱내 작업도  아키타 대학 광업 박물관 소장

인나이 은광의 최대 전성기는 1836년부터 약 10년간으로 1개월 산출량은 100관목(375kg)을 넘는 호경기가 계속 되었습니다.

당시는 4,000가구, 인구는 15,000명으로 구보타성곽 주변 마을보다 더 번성하였습니다. 이 그림은 1858년의 그림으로 갱내의 작업 모습이 자세히 그려져 있습니다.

Back to Osumiyagur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