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키타번주인 사타케 가문은 세이와 천황의 혈통을 이어받아, 전국 300여의 여러 다이묘중에서도 손에 꼽힐 명문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11세기 말의 고산넨전에서 활약한 미나모토 요시미쓰를 시조로하며 그 자손인 마사요시가 히타치에 있는 사타케 마을을 본관으로 하고 있었던 이유로 사타케라는 성을 사용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또 오슈 전투에 참가한 5대손 히데요시가 미나모토 요리모토로부터 받은 깃발에 5개의 부채살이 있는 보름달의 부채모양을 가문의 문양으로 했습니다.
그 후, 남북조 시대, 무로마치 시대에 걸쳐 착실히 세력을 확보한 사타케 가문은 전국시대에는 유력한 전국 다이묘로 성장했습니다. 20대손 요시시게의 대에서는 히타치뿐만 아니라 관동, 오슈지역까지 세력을 확대해, 일본 동부의 주요 군벌로서 활약을 떨쳤습니다. 21대손(아키타 첫 번주)인 요시노부는 천하인으로 군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신임을 받아, 히타치에서 54만5천석의 영토를 받아 “하시바-히타치-지쥬(히타치 지방의 도요토미의 신하)”라는 칭호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도요토미가 몰락한 후, 패권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아키타로 영지를 옮기라는 명을 받아 초대 아키타번주가 되었습니다. 이후 사타케 가문은 12대 번주인 요시타카에 이를 때까지 아키타번주로서 아키타의 발전에 진력했습니다.
구보타성곽 주변 마을의 건설과 발전
1602 년 아키타로 영지를 이동하게 된 사타케 가문은 처음에는 안도씨가 사용해온 쓰치자 키의 마나토성으로 들어갔습니다만, 1603 년부터 구보타 신메이산에 구보타성을 축조, 완성한 후 미나토 성으로부터 이동하여 성곽 주변 도시 건설에 착수했습니다. 아사히가와 강을 서쪽에 만들고, 강 동쪽에는 무사 마을(내측 마을), 서쪽에는 상인 마을(외측 마을)로 배치했습니다. 또 다이헤가와 강은 남쪽방위를, 상인 마을 외곽에 배치한 사원은 서쪽방위를 위함이었다.
내측 마을은 구보타성의 군사적, 정치적 기능을 고려하여 건설되었습니다. 산노카쿠(三の郭)로 불리는 구보타성과 내측마을의 경계부분에는 거대한 해자(적의 침입을 막기위한 호)와 둔덕을 둘러쌓아 고위 가신을 배치했습니다. 이어지는 욘노카쿠(四の郭 ,현 가메노쵸)에는 중급 가신이, 외곽(현 쓰키지, 나라야마, 데가타, 호도노)에는 하급 무사와 보병이 배치되었습니다. 성곽 주변 도시 건설은 30여년의 시간을 투자한 거대 토목공사였습니다. 이러한 도시가 현재의 아키타시 중심부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사타케 가신단 구성
아키타로 영지를 옮기라는 명을 받았을 때, 사타케 요시노부는 추종자를 최소한으로 구성하여 가신단을 재편성했습니다. 새로운 가신단의 중심은 사타케 가문의 요시시게, 요시노부의 측근과 친족이었습니다. 그들은 영내의 토지를 하사받았지만 번의 정치에서는 제외되어 모두 번주의 명을 따르게 하는 형태를 취했습니다. 이러한 개편에 의해 사타케 종가의 지배권을 확고히 하여 권력 분쟁을 제거했습니다.
또한 상급 가신은 가문에 따라, 중급 이하의 가신은 소유지의 연간 수확량에 따른 조세의 양과 계층 구조로 고정되었습니다.
또한 요시노부는 새로 입성한 가신일지라도 유능한 인재를 등용시켰습니다. 아키타번의 토지제도 확립에 공적을 세운 시부에 마사미쓰와 번정 확립에 실력을 보인 우메즈 형제(노리타다와 마사카게)등도 요시노부 대에서 등용된 신참 가신이었습니다. 1627년의 단계에서의 가신의 수는 2,473명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